모멘텀을 잃어서는 안 된다. 오랫동안 쉬면 모멘텀을 잃는다. 모멘텀을 받고 있는가? 그렇다면 쉬지 마라. 모멘텀이 찾아오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준비해야 한다. 흐름을 타면 승리를 가져간다. 승리를 이뤘을 때, 자만하지 말고 모멘텀을 이어가라. 잘 되고 있는 것을 계속 해야 한다.
서브스턴스 영화를 봤다. '서브스턴스(Substance)'는 본래 1) 물질, 2) 실체, 3) 본질 혹은 핵심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다. 영화 속에서 이 단어는 겉으로는 ‘물질’을 뜻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어떤 물질을 몸에 주입한 후 세포 분열을 통해 또 다른 존재인 ‘수’가 탄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단순한 물질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고, 오히려 ‘실체’라는 두 번째 의미에 더 집중하게 만들었다. "REMEMBER YOU ARE ONE." 서브스턴스 사용 설명서에 나오는 문장이다. 저 말은 자아가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주인공 엘리자베스는 '수'와 갈등한다. 이는 곧 자아의 분열이다. 그녀는 심리적으로 자아를 통합하고 개성화(individuation)에 이를 수 있는 나이대임에도, 그 기회를 놓치고 만다. 내면의 분열된 자아, 즉 '억눌렀던 욕망과 그림자'를 직면하고 통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정한 성장은 내 안의 낯선 것들과 마주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 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수’를 제거하고 외면하려 했다. 그 결과는 자아의 폭주이자 자기 파괴로 이어졌다. 젊음은 영원할 수 없고, 사회적 인정 역시 무너지기 마련이다. 그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자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 삼켜진다. 주인공이 외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고, 또 다른 자신의 자아를 찾는 여정을 떠났다면 자기 파멸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꿀 수 없는 것을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분열에서 통합에 이르는 과정이 수월할 것이다.
황금 불상 잃어버린 나를 찾는 여정 혹시 스스로의 가치를 잊은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나요?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이 정도면 됐어'라며 스스로를 진흙과 콘크리트 속에 가두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오래전 태국에서 전해 내려오는 '황금 부처' 이야기는 바로 그런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혹은 존재조차 몰랐던 우리 안의 눈부신 황금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열쇠가 될 것입니다. 오래된 사찰의 비밀: 황금 부처 이야기 오래전 태국, '황금 부처의 절'이라 불리는 사찰에 거대한 황금 불상이 있었습니다. 평화롭던 마을에 이웃 국가가 쳐들어올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귀한 황금 불상을 지키기 위해 기지를 발휘했습니다. 바로 불상 전체를 진흙과 콘크리트로 덮어 평범한 '돌부처'처럼 위장하는 것이었죠. 계획대로 적군은 사찰을 지나치며 아무 가치 없어 보이는 돌부처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불상은 약탈의 위기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오랜 세월이 흐른 탓일까요? 마을 사람들 그 누구도 돌부처 안에 눈부신 황금 불상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젊은 승려가 돌부처 앞에서 명상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명상을 마치고 일어나려던 순간, 불상의 표면에서 콘크리트 조각 하나가 '툭'하고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틈으로 무언가 찬란하게 반짝이는 것이 보였습니다. 젊은 승려는 곧장 다른 승려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모두가 달려와 끌과 망치로 조심스럽게 돌을 벗겨내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두꺼운 진흙과 콘크리트가 모두 떨어져 나가자, 그 안에서 수백 년간 잠들어 있던 영롱한 황금 불상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 우리는 모두 황금 부처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 입...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그래. 이렇게 살다가 죽은 사람들 천지겠지? 삶의 본질은 고통이고, 앞으로도 이 가치는 영원할 것이다. 세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버티고 버티는 날의 연속이고, 그러다 죽는 것이다. 누굴 원망할 수도 없다. 예수님조차 고통을 피할 수 없었다. 무의미함 속에서 유의미함을 찾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아니 차라리 무의미하게 사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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